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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비록 ⑳]국세청장, 그들의 프롤로그는 창대(昌大)했다? <上>

(조세금융신문=김종규 논설고문 겸 대기자)

1966~1997년 기간은 국세행정의 기반확충 때였다.
세정개혁과 전산화에 행정력을 집중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개청 이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고도 경제 성장기였기에 세정발전의 기초를 공고하게 다져나가는데 힘을 쏟았다.


국세행정은 신경제5개년계획 기간까지 개방화, 자율화, 정보화 그리고 세계화 등 급변하는 세정환경 대응에 진력해왔다. 그간 행정의 역량을 키우고 내실을 굳건히 쌓았다는 평가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국세청장 얼굴이 바뀔 때마다 증수(增收)극대화를 위한 과세체계가 변화·변질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납세자의 조세부담 수준 따위를 챙길 겨를이 없을 만큼 세수확보 행정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


세수 증대에만 일관했던 1960~1970년대와는 달리 2000년대는 납세자가 더 이상 친절이나 대민봉사 대상이 아니라는 관점이 두드러진다. 과세관청과 동 등한 법적지위를 가지는 권리의 주체로 보는 시각이 점차 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납세자가 세무공무원을 뛰어 넘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경제주체라는 인식이 쉼 없이 업그레이드되어 왔다. 간과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접근했다는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다.

 

어찌 보면, 자율세정도 이를 바탕으로 설계된 국세행정 운영방향 설정이고, 소통을 통한 자율 확대다. 역대 국세청장들이 이끈 국세행정은 프롤로그도, 에필로그도 모두 다 창대(昌大)했다. 그러나 ‘역대 국세청장’ 중에는 서막은 창대했으나 그 끝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사례로 세정사(史)에 찍힌 흔적이 역력하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한 것이 우리네 일상인데 말이다.

 

 

 

박 대통령, 세수확보에 전력 쏟으라는 칼날 같은 명령 내려
세무공무원 부정 근절 위한 제도적 방안 강구…청사진도 제시

조세가 경제개발 등을 위한 정책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때는 1967년대부터다. 세제상 각종 유인제도를 활성화해서 투자촉진, 저축증대, 소비억제 그리고 중요 전략산업의 육성도 도모해 왔다.


그 일환책으로 마련된 것이 1967년 11월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이다.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의 착공을 앞두고 당시 대도시와 고속도로 주변지역의 지가가 급등함에 따라 투기억제 관련 특별조치법을 도입하게 된다.

 

당시 세정의 첫째 임무는 정부의 시급한 정책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필요투자재원을 적기에 확보·조달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로 부각되게 됐다.


이에 따라 세정 운영방향도 재정수입 확보에 역점을 두게 된다. 1966~1969년대를 재정자립과 국세행정의 기반구축을 위한 서막이 열리는 시기로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낙선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을 ‘조세행정특별조사반장’에 임명하고 세수확보에 전력을 쏟으라는 칼날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낙선 반장은 박 대통령의 엄명을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 능력을 인정받게 됐고, 1966년 국세청 창설멤버로 등장, 초대 국세청장으로 임명됐다. 현역중령이자 청와대 비서관이던 이낙선 청장은 당시 나이가 39세. 이립(而立)의 나이였기에 뭇 관료들의 동경의 대상인물로 급부상했다.


1969~1973년 기간은 경기침체 극복과 세정발전 방향을 모색했던 시기다. 해병대 중령 출신인 오정근 2대 국세청장은 공정세정, 부정 방지, 개발재원확보, 아이디어개발 등 4대 세정방침을 밝힌다. 오 국세청장은 “외원(外援)이 거의 감축돼 가고 자립경제의 기틀이 마련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세청이 감당할 내국세 증수(增收)문제는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공정세정을 최대목표로 삼겠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오 청장은 세무공무원의 자유재량의 폭을 대폭 줄여 세무공무원의 부정을 제도적인 면에서 근절시키는 방안을 강구, 비합리적 부문의 정상화를 통해서 세수를 증가시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미래지향적 세정을 펴나갔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와 국민경제 침체 등에 따라 세수확보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7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경기침체로 극심한 인플레 환율상승, 고리사채에 의존하는 기업자금 조달, 불건전한 기업경영 등이 더욱 심화되어진다. 1972년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긴급명령’ 이른바 8·3긴급명령이 시행된 시기이기도 하다.


10·26사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정치적 격변은 세정불신으로 표면화
3대째 독차지한 군 출신 국세청장 ‘맥’끊기고 민간인 국세청장 최초로 등장

연도 말 세수 목표에 미달하는 경우 관서별로 일정금액을 할당해서 징수를 독려하는 폐단이 생겨났다. 특히 납세의무가 확정되기도 전에 세금을 미리 징수하는 소위 조상징수가 행해졌고, 이로 인해 납세자의 권리에 중대한 침해가 될 뿐 아니라 나쁜 세무행정이라는 신뢰추락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1973~1978년 기간을 부가가치세 도입 등국세행정 합리화 시기로 평가한다. 그 중 하나가 1970년대 중반부터 국세청은 세수확보 위주의 세정에서 탈피해 침체돼 있던 조직을 활성화하고 모든 분야에서 대대적인 쇄신, 세정방 향의 전면적인 전환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74년에 일반재정수입 중 국세 비중이 87.3%, 내국세 비중이 68.6%를 차지하면서 재정수입 전액을 해외원조가 아닌 국내재원으로만 충당하게 된다. 이로써 1974년 이후 완전한 재정자립을 뒷받침했으며, 1975년에는 내국세 세수 1조원을 돌파하는 세정사적 기록을 만들었다.


육사8기 출신인 고재일 전매청장이 1973년 3월 제3대 국세청장으로 취임한다. 공평인사, 행정의 능률화, 납세도의 함양, 세정 과학화를 역점적으로 추진한 고재일 국세청장은 전국의 57만 대중세 납세자의 30%에 해당하는 17만 명에 대해서 장부비치와 정확한 기장을 권장, 기장신고자는 원칙적으로 신고대로 세금을 내게 자진신고납부 행정을 펼쳐 나갔다.


1979년의 부마사태, 10·26사건,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게 된다.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세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불신이 표면화됐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국세당국의 일방적 세정을 지양하고 납세자와 함께하는 쌍방·협조적 세정이 절대 필요했고 잔존부조리 제거는 물론 공평과세 실현이 불가피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소위 군부출신 국세청장은 여기까지이고, 그 맥이 끊긴다.

 

명성그룹 범양상선사건 등 경제사회적 파장 큰 사건 잇달아 터져
‘6·29 선언’전격발표 따라 시대흐름에 보조 맞춘 세정민주화 박차

 

 

이즈음 국세청 최초의 민간인 국세청장이 등장하게 된다. 1978년 12월 김수학전 충남 도지사(전 경북 도지사)가 4대 국세 청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김 청장은 세금을 웃으면서 주고받도록 이끌어나가겠다는 포부를 강조했고 납세자들의 성실납부도 당부하게 된다.


특히 세무공무원의 엄정한 기강확립이 요구됐고 이에 따라 세정쇄신을 추진해 나간다.
1982~1987년 기간은 경제성장에 따른 세정 역할 재정립 시기라 하겠다. 이 기간은 경제발전과 산업의 고도화 과정에서 새로운 첨단 기술과 관리기법이 도입되기도 했지만, 고조된 국민의 민주화 욕구에 수반해 고개를 들기 시작한 납세자의 불성실 신고, 부가가치세 부당환급 신고 등이 세정의 새로운 고민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 중 하나가 1982년 5월에 발생한 이철희·장영자 사건이다. 이어 명성그룹 사건, 영동개발 사건, 범양상선 사건 등 경제·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던 대형 사건들이 유난히 잇달아 터졌다. 국세행정의 역할이 주목을 끌게 된 이유라 하겠다.


1985년 9월경 3저(저달러화, 저금리, 저유가)현상이 나타나면서 우리경제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매년 10%가 넘는 고도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안무혁 사회정화위원장이 1982년 5월 5대 국세청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사회정화차원의 의식개혁운동을 주도한 덕분에 국세청 조직쇄신을 이끌어갈 적임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안 청장은 “납세자 편에 서서 일을 처리해 나가겠다”는 각오와 더불어 “국민은 가난해서 겪는 고통은 감내하지만 불공평에서 오는 고통은 참지 못 한다”고 전제, 공평과세를 천명하기도 했다.


제5공화국 시절 마지막 국세청장이 된 성용욱 청장은 세원·세수의 공정관리, 대민업무의 혁신, 세정과학화, 세정혁신을 중점 추진한다. 1987년 5월 육사출신 성용욱 감사원 사무총장이 6대 국세청장에 취임하게 된다. 1987년 이른바 ‘6·29 선언’이 전격 발표됐고, 이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민주화 기대감이 고조됐고, 이에 따라 국세행정도 시대적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나갔다.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시장경제 투명성 제고
문민정부 개혁기조에 부응 대대적인 변화와 세정개혁 집행

1988~1991년 기간은 1988년 2월 6공화국 출범 시기다. 조세의 중립성을 통한 경쟁촉진과 시장경제체제의 확립에 역점을 두게 된다. 지속된 부동산 투기와 과소비 풍조, 사치성 소비업종의 번창으로 사회기풍이 흐트러졌고 사회간접자본의 부족과 일부 부문에서의 인력난은 경제 안정 기조를 저해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정부는 1990년에 들어 대폭적인 세제개편 작업을 착수하게 된다. 정통 세무관료 출신 최초의 국세청장으로 기록되고 있는 서영택 국세청장은 1988년 3 월 7대 국세청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서 청장은 세정면에서도 민주화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워 “세무공무원은 친절하나 세법은 무섭다”는 인식으로 바꿀 수 있도록 “모든 세정을 적법하게 펼쳐나가겠다”는 포부를 피력하기도 했다.


1991~1995년 기간은 민간주도의 경제 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행정규제 완화에 역점을 둔 대대적 세정개혁과 공직풍토 쇄신의 시기였다. 시장경제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조치로써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게 된다. 1993년 출범한 문민정부는 부패척결, 경제 활성화, 국가기강 확립을 국정지표로 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국세행정도 문민 정부의 개혁기조에 적극 부응해 대대적인 세정개혁을 집행했다.

 

 

1991년 12월 8대 국세청장에 취임한 추경석 청장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9대 국세청장으로 재신임, 재임명됐다. 추 국세청장은 30여 년간 세무공무원의 외길을 걸어온 인물로서 첫 내부승진 청장으로도 이름나 있다.


또 추 청장은 “날로 세원이 다양화·전문화되는 추세를 감안, 기업에 대한 조사를 펼 때 업종별로 나눠 조사를 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취임과 함께 밝힐 정도로 세무조사 행정에도 각별한 개선기조의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1995~1998년 기간은 납세자 권익보호와 국세행정의 전산화 등 새로운 변화를 맞는 시기였다.
문민정부 출범 4차 연도로서 각 분야의 변화와 개혁 노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세정측면에서도 민주세정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변화에 부응하기 위해서 국세청은 정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팀제’를 도입해 기능별 조직운영이라는 혁신을 실현해 냈다. 정통 세무관료 출신인 임채주 국세청장은 두 번째 내부 승진한 10대 국세청장으로 자리하게 됐다. 임 전 청장은 납세자 위주의 세무행정과 공평과세의 실현에 기치를 내걸고 국세행정의 선진화 추진에 진력해 왔다. 그러나 그 끝은 창대하지 못한 역대 국세청장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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