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산업화(industrialization)는 개인의 건강, 질병, 그리고 죽음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장기간에 걸친 의료화(medicalization)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환경이나 사회적 과정보다 의사에 의존하는 치료 중심으로 변했다. 의대 입학 후부터 난해한 의학 지식으로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면서 집단적 응집력과 폐쇄적 구조를 형성했다. 우리나라는 1999년 의약분업 사태를 시발점으로 의사들이 의대입학 정원의 동결을 배경으로 배출 인원과 자연 감소에 의한 의료 인력을 관리하고, 인구의 증가와 고령화에 따른 의료 수요의 증가로 의료비용이 증가해 왔다. 건강보험제도 실시 따른 의료 수요 확대 의사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일탈을 제거하는 문화적 가치와 규범의 수행자로 개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환자는 아프면 빨리 회복하기 위해 의사의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라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의사는 생물학적 기술뿐만 아니라 권위를 가지는 집단으로 변모됐다. 의사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자율성을 가지면서 의료 내 다른 직군과 환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됐다. 의사들은 의료 기술을 기반으로 제도적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조성원 순례자는 한화그룹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오로지 한 곳에서 40여년간 청춘을 불사르고 재경 분야 임원까지 올랐다가 용인경전철 대표를 마지막으로 퇴직했다. 퇴직에 즈음해서 2018년 지구의 둘레인 4만여 킬로미터에 해당되는 거리를 걷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매일 2만보씩 걸었다. 그 목표가 완성되어 가면서 마지막 피날레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길, 산티아고 4대 순례길의 하이라이트! 산티아고 순례길은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지를 갈 수 없게 되자 순례의 대체지로 유럽 전역에서 많은 순례 객들이 오면서 시작됐다. 그가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러 개의 경로가 있는데 ‘프랑스 길’은 투르의 길, 리모주의 길, 르 퓌의 길, 툴루즈의 길에서 각각 시작해 생 장 피에드포르에 합류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다음에 바스크 주, 아라곤 주, 나바라 주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야고보의 순교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순례길이다. 또 다른 순례길로 ‘스페인 길’은 출발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아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는 신령의 보호를 받는 마을 안과 보호받지 못하는 마을 밖을 연결하는 영역이었다. 마을의 뒷산이나 부근의 산은 우주를 관장하는 상당신(上堂神, 산신당)을 모시고, 마을의 입구는 장승, 솟대(짐대), 돌탑, 선돌 등으로 하당신(下堂神, 서나당)을 세웠다. 마을 변의 거석은 하늘과 태양에 이르는 매개체로 초자연적인 숭배의 대상이면서 제단으로 사용했다. 거석문화는 선돌(menhir), 돌멘(dolmen), 스톤서클(stone circle), 스톤어라인먼트(stone alignment) 등으로 인류 문명과 함께 해오고 있다. 마을의 하당신, 돌무더기와 선돌 돌무더기는 선사시대의 거석 기념물로 일정한 장소에 돌을 모으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돌을 쌓으면서 안전과 소망을 기원하는 정령 신앙의 표현이면서 대상이었다. 주로 냇가의 돌이나 산의 돌을 이용하여 둥근 형태로 쌓아 올린 후 정상부에 길쭉한 신줏돌을 세운다. 산길이나 들길에 돌을 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안내 표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몽골의 돌무더기인 ‘어워(Овоо)’는 광활한 초원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정표이면서 주변을 돌면서 안전을 기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태양숭배는 긴 일조량과 따뜻한 기후를 소망하면서 나타났다. 태양이 계절의 순환을 만들면서 농작물의 경작을 결정했다. 태양을 상징하는 곡옥, 동검과 동경이 주술적인 목적의 도구나 위세품으로 사용되었고, 무덤에 부장품으로 함께 묻었다. 옥(玉)은 가장 정결하고 순수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태양 속에 사는 삼족오(三足烏)는 세발 달린 까마귀로 태양과 땅에 살면서 하늘, 사람과 땅을 연결하였다. 태양의 상징인 위세품, 곡옥과 동경 곡옥은 왕권 혹은 지배계급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식품이다. 홍산문화는 옥의 소유를 특별한 지위의 상징물로 여겨서 무덤의 부장품으로 사용했다. 곡옥은 머리부분에서 크고 굵으며 꼬리 부분으로 가늘게 꼬부라져 있다. 크기는 1센티미터부터 10센티미터 내외까지 대부분 옥으로 만들어졌다. 곡옥은 힘의 상징이나 장신구, 호부(護符)나 주술적 의식용구, 초승달 숭배로 반달장식이라는 가설이 있다. 곡옥은 반월형에서 두툼한 초승달 모양으로 점차 변화되었다. 옥이 시신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고, 시신에 옥을 부장하기도 했다. 합옥은 부활, 색옥은 육체의 정기, 옥돈은 내세의 양식을 상징했다. 동경은 태양을 상징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지식은 원리를 통해서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지식의 특수성과 유사성을 인정하면서 신뢰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식은 과거를 말하는 철학, 미래를 이야기하는 과학, 그리고 인간의 본능과 경험(실험, 관찰 등) 등을 합쳐서 이루어진다.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은 대학에서 지식을 창출하고 전파하면서 국가의 발전과 산업의 성장에 활용하고 있다. 지식의 생성: 불확실성과 확률의 탄생 지식은 오랜 기간의 유물, 유적과 사건들의 빅데이터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자료가 많을수록 그 원인이나 현상을 빨리 찾을 수 있지만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도 존재할 수 있어 근본적인 실체를 찾기는 어렵다. 초기 값이 지식을 결정할 수 있는 출발점이지만 첫 정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지식을 정의하기 어렵다. 확률(probability)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특징을 반복적으로 측정해서 얻는다. 베르누이(Bernoulli)는 반복 실험에서 얻은 경험 확률로 미지의 기대 값과 확률을 계산했다. 베이즈(Bayes)는 이론 확률(사전 확률)에 추가 정보를 반영하여 새로운 확률(사후 확률)을 계산했다. 베르누이 확률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조공은 중심국(종주국)인 중국에 대하여 제후국(번국)인 속국의 충성을 나타내는 위계 구조였다. 황제는 제후국의 조공을 통하여 상징적인 통치권을 인정받았고, 제후국은 지배 영역의 종주권에 대한 중원의 확인을 받았다. 동아시아는 조공과 책봉으로 환경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각 국가가 독자적인 통치를 수행하였다. 조공에 따른 책봉의 역사 최초 책봉의 기록으로 근초고왕이 동진(東晉)에서 진동장군령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를 받았다. 송(宋)은 전지왕에게 책봉하면서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한단계 승격시켰다. 백제의 관료로 신하였던 부여례가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를 받고, 장무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를 받았다(472년). 양나라는 무령왕에게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 521년), 성왕에게 지절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524년)을 수여했다. 성왕이 양나라에 시경(詩經) 전문가를 요청했고, 양무제는 예학의 권위자인 육후(陸詡)를 보냈다. 위덕왕은 동제에서 사지절시중거기대장군대방군공백제왕(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동아시아의 묘제는 세월의 변천에 따라서 그 양식이 변해왔다.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은 계급 사회의 도래에 따른 지배자의 우위를 상징하면서 하늘에 제사하는 제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적석고분은 만주계 양식이지만 백제의 한성과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던 소백산맥 지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고인돌이나 적석고분이 사라지고 봉분을 흙으로 조성하는 횡혈식 석실분과 중국식 통광묘가 묘제의 주용한 형식으로 자리하였다. 무덤과 제단, 칠성바위의 역할을 했던 고인돌 고인돌은 납작한 판석이나 돌덩이 밑에 ‘괸 돌’ 또는 ‘고임돌’을 놓았다. 고인돌은 무덤이면서 제단이며,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돌 방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덮개를 얹었다. 탁자형은 시신을 지상에 놓아두고 평지에 높은 받침돌로 무덤 방을 만든다. 덮개형은 땅을 파고 무덤방을 돌로 덮는다. 바둑판형은 무덤방 주위에 돌무지를 쌓고 다시 덮개 돌을 놓았다. 강화 고인돌은 탁자형으로 받침돌에 덮개 돌을 놓았다. 보령 죽청리 고인돌은 중심에 낮은 받침의 덮개형 고인돌로 제단을 만들고 주변에 남방식 고인돌을 배치했다. 신안 방월리 고인돌은 7기의 고인돌로 칠성바위를 형성하고 있다.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반도와 대륙이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불안할 때 일본열도로 간 인구이동이 지난 2천년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까지 벼농사, 청동기, 철기, 관개농업 등이 이주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6세기에서 7세기 후반까지 차례로 가야,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많은 유민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0년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인구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류하였다. 백제계 주민의 큐슈지역 정착 왜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백강전투에 참여했다(663년). 백제 부흥전쟁이 실패하자 백제 유민들이 대거 왜로 이주하면서 일본은 나당에 대한 적개심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했다. 후지와라 노후히토는 백제의 유민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善光)이 일본에서 백제왕의 작위를 받았다(속일본기). 백제가 멸망하자 지배층이 일본 수군과 함께 건너갔고(663년), 백제 왕족들과 일반인들이 오사카, 교토, 큐슈 일대에 정착했다. 왜의 수군이 남도지역에 상륙하여 백제인을 수송해 왔다(663년 10월). 여자신, 귀실집사(기시쓰 슈시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는 도교의 오행설에 따라서 군대의 깃발을 황색으로 통일하였다. 도성의 남쪽에 남단(南壇)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천제를 올렸다. 도교문화는 삼신산과 무릉도원을 표현한 산수문전, 봉래산을 조각한 백제금동대향로, 그리고 부여 궁남지의 방장산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백제 예술의 극치이면서 한국 예술의 원류가 되었다. 도교적 사고의 산수문전 토지는 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사용시 신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무령왕릉 지석(誌石)은 토지신에게 땅을 샀다는 토지 매지권을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에 도교의 도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 내는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의 표현이 있디. 왕릉 입구의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는 뿔과 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침입자나 악귀를 막고, 죽은 영혼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한다. 남조의 황제릉에 돌로 만든 진묘수 한 쌍을 무덤 앞에서 세웠다. 외리문양전은 부여 외리의 사찰터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벽돌로 42매가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었다(1937년). 보물로 지정된 8매는 봉황무늬, 산수무늬, 산수도깨비무늬, 산수봉황무늬, 연꽃도깨비무늬, 연꽃구름무늬, 연꽃무늬, 용무늬이다. 특히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큐슈는 고대 문화를 공유하면서 활발한 교류로 서로 협력했었다. 양 지역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유적이 많고, 역사적으로 풀리지 않은 흔적들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교류의 흔적으로 보이는 서로 비슷한 유물이 양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왜는 가야, 마한과 교류하면서 발전을 이루다가 4세기 중반부터 백제중심으로 바뀌었다. 고대 한반도 남부와 왜의 큐슈와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가장 큰 부분이 무덤양식이다. 토기문화의 흔적, 항아리와 옹관묘 옹관은 초기 철기시대에 생활 용기에서 묘제로 변하여 전용의 U자형으로 발전했다. 세계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묘제로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시작하여 동아시아 전역에 확산되었다. 초기 철기시대는 부장품을 묻지 않다가 3세기부터 토기, 구슬, 철기 등을 함께 사용했다. 영산강 유역은 대형 옹관과 옹관 고분이 형성되어 있다. 후에 이 지역의 고분은 석실에 옹관을 배치하는 석실분과 옹관묘의 혼합된 양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옹관묘는 마한지역의 보편적인 묘제로 4세기에 대형화되면서 U자형으로 바뀌었다. 여러 개의 옹관들이 한 곳에 발견되면서 가족이나 씨족의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병자호란을 전후의 동아시아 정세와 서구의 식민지 개척에 따른 국제 패권의 변화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여진족은 청을 세워서 역대 최고의 왕조를 구축했지만 조선은 왕권의 약화와 당파 싸움으로 국제질서에서 배제되었다. 오히려 동일하게 쇄국정책을 취했던 일본과 통신사와 국왕사를 상호 파견하면서 평온한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함경도와 여진족의 관계 여진족은 목축과 수렵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하면서 계급을 형성하고 국가를 탄생시켰다. 조선 건국의 출발점인 함경도 경원(慶源)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로 북방 유목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북방계인 숙신‧읍루‧예맥‧부여‧말갈 등이 지배하다가 고구려‧당나라‧발해‧거란‧금나라‧원나라‧명나라의 통제를 받았다. 주로 여진족이 활동하였고,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였고, 그 아들인 이행리(李行里)도 이곳의 관리를 지냈다. 이곳의 관리였던 이징옥(李澄玉)이 계유정난으로 파면되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내세운 ‘이징옥의 난’을 일으켰다((1453년). 누르하치의 직계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이 지역에서 살다가 뒤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서 융합문화를 형성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탑으로 초기에 나무를 이용하여 목탑을 세웠고, 후에 석재를 이용하여 석탑을 조각했다. 목탑은 재질의 특성상 수명이 짧기 때문에 오래 전에 제작된 건축물은 찾기 어렵다. 목탑의 건축뿐만 아니라 목조건축물의 지붕 비례를 적용하여 석탑을 세웠다. 백제의 석탑은 각 층의 지붕 돌(옥개석)이 몸 돌보다 상대적으로 깊고 넓게 만들어졌다. 백제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 정림사지 오층석탑, 그리고 왕궁리 석탑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백제의 목탑, 호류지오중탑과 능사지 오층탑 목탑은 중심 기둥의 심초석을 중심으로 각 층간 비례를 만들어서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백제 목탑의 원형은 높이 35미터의 호류지 오중탑으로 1층 내부 심주(心法)의 둘레에 사천주(四天柱)를 세우고, 그 내부에 수미산을 쌓은 후 소조상(塑造像)을 사면에 장식했다. 부여 정림사지에서도 소조상 파편이 발견되어 초기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는 중앙의 목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석탑을 배치하는 3탑 3금당식의 가람을 구성했다. 백제는 신라의 황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반도의 도성은 왕과 귀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주작도로, 왕궁, 사찰, 왕릉, 삼신산과 산성을 배치한다. 핵심 경관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과 ‘왕이 신선이 된다’는 왕릉이다. 삼신산이 도성을 둘러싸고 남쪽에 왕의 보호를 받는 왕릉을 배치했다. 고대의 도성은 평지에 건설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수비용의 산성으로 2성 체계에 강을 끼고 있었다. 강은 교통의 중심이면서 주변의 충적평야에서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는 기반이었다. 도성 주변을 둘러싼 환산성은 개별 산성이 장기 농성하면서 방어하여 도성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고구려의 도성 구조는 한반도에서 가장 기본이 되며, 고대 도성 건설의 모범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천도를 하면서 대응하고 국가를 발전시켰다. 도성의 기본 경관인 삼신산과 왕릉 삼신산은 도성에서 기본이 되는 경관으로 국내성의 우산(禹山), 칠성산(七星山), 용산(龍山), 평양의 대성산, 고방산, 청암리산, 한성의 검단산(崇山) 또는 아차산, 금암산(釜山), 청량산(漢山)을 중심으로 했다. 사비는 금성산(日山), 부산(浮山), 부소산(吳山)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왜의 아스카는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 국가의 수도는 통치자의 집무실과 관저를 포함한 주요한 국가 기구들이 밀집되어 있다. 주요한 의사결정이 전국적으로 신속히 실행될 수 있도록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의 근간이 된 옛 수도의 모습은 왕이나 황제가 거주하는 왕궁이 있는 도성과 도성의 경제적 기반인 경기지역을 구분하였다. 현대에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수도의 위치나 경제적 배경의 조건을 완화시키면서 국가기구들의 분산과 분할로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전통적인 수도의 조건 고대부터 시작된 중앙집권제는 도성을 중심으로 직할지인 경기지역과 주변지역을 구분하여 통치했다. 도성은 국가의 설립과 성장을 반영하면서 지배계급인 왕과 귀족들이 살던 국가의 중심지였다. 내부적으로 정치와 경제에서 월등한 힘을 가진 지역단위를 형성하면서 타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될 수 있는 곳이 선택되었다. 이론적 근거는 거중(거점지 중심)과 관중(관할지 중심)이며, 위치는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기 쉬우면서 외적의 침입에 항거하기 좋아야 한다. 유형은 분지형, 평원형, 반분지반평원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국은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장안에서 개봉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계속 도성을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민간신앙은 원시사회에서 계급사회로 이동하는 시기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다. 인류는 자연현상이나 천체 변화를 신의 경고와 계시로 받아 들였다. 용은 풍운 조화를 일으켜서 비를 내리며 바다를 관장한다. 수도작 문화는 물관리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비를 다스리는 용(龍)신앙이 뿌리깊게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칠성(七星)신앙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숭배하는 신앙이다. 수도작 문화와 용신앙 용은 천상, 지상, 지하를 넘나드는 ‘미르신앙’의 대상이었다. 모든 존재하는 동물과 상상의 동물에서 뛰어난 능력과 장점을 취합해서 불멸성과 초월성을 나타냈다. 그 모양은 뱀 머리, 사슴 뿔, 귀신 눈, 소 귀, 뱀 목, 조개 배, 잉어 비늘, 매 발톱, 호랑이 발바닥을 닮았다. 용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하늘과 물에서 자연의 조화를 부리고 인간의 염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영물이다. 발가락이 다섯 개인 용은 황제, 네 개인 용은 제후, 세 개인 용은 재상을 상징한다. 용 신앙은 물신과 용신이 세월이 흐르면서 합쳐져 형성되었다. 농경에서 강우의 신, 풍파를 주재하는 바다의 신으로 숭상되었다.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실이 용신의 계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고대에 일반인들은 움집이나 초가집에서 살았다. 움집은 추위를 견딜 수 있지만 충분한 공간을 얻기가 힘들다. 초가집은 내부 공간을 넓게 확보할 수 있지만 건물의 지속성을 얻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기와집은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으면서 침수를 차단하고 부식을 방지하면서 외관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도 있었다. 기와가 주요한 자재로 이용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기와를 만들었고 지붕을 떠받드는 목재도 다양한 크기와 용도를 구성했다. 전통적인 건물 양식에서 하앙과 장식기와는 건물을 웅장하게 보이면서 멋을 내기 위하여 치장하던 부재였다. 건물을 웅장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하앙 초기 건축은 기둥과 기둥을 보로 연결하여 지붕을 떠받치는 가구식이었다. 벽으로 건물을 받치는 벽식 구조는 넓은 공간을 만드는데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는 정사각형에 배흘림 기둥을 세워서 가로선과 세로선, 대각선이 황금비를 이루도록 했다. 지붕은 기와로 지을 경우 팔작, 맞배, 우진각, 십자형, 육모, 정자형 등의 형태였다. 맞배지붕은 수덕사 대웅전, 무위사 극락보전, 선운사 대웅전, 화암사 극락전 등에서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역사는 인류가 만들어 온 실체적 산물의 결과이기 때문에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신화는 문자가 없어 역사를 기록하지 못하던 시대에 구전의 결과로 나타난다. 반면에 문자가 정착되면서 신화는 사라지고 당대에 존경받는 인물들이 세월이 흘러서 영웅으로 등장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들은 각국의 고유한 신화를 간직하고 있지만 신생국가들은 영웅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초강대국이면서 신생 국가인 미국은 신화보다 영웅을 중시한다. 신화적 사고와 정체성의 형성 신화적 사고는 우두머리나 권력을 뒷받침하는 수단이었다. 신화(神話)는 계급사회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신과 인간을 둘러싼 한 나라 혹은 민족에게 전승된 이야기이다. 신이나 영웅이 초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합리화되고 정당화되었다. 인간이 신의 통제 하에서 예정된 일을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류 문화는 신화의 보편성을 활용하여 역사를 해석하려고 했다.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는 신과 영웅의 역사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신화적인 행사는 축제, 무용, 음악, 문화, 교양으로 계승되면서 발전해 왔다. 단군은 종교의 제사장과 정치적 군장의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이동생활을 했던 유목민족은 새로운 정착지에 융합하고, 불안했던 삶은 영혼의 부활과 불멸의 세계를 추구했다. 초기에 다양한 자연물과 자연현상에 신의 존재를 부여하면서 환경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했다. 하늘과 인간의 중재자는 샤먼(Shaman)으로 선지자 또는 주술사를 의미한다. 샤머니즘은 유라시아, 아메리카, 한반도와 일본열도 등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된 유목민족의 세계관이었다. 샤먼은 고대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세계관이었다 샤먼은 정신의 위기를 연출하여 주변인들을 빠져들게 하고 신령의 계시를 받아서 점을 치거나 병을 고쳤다. 무속은 생활 그 자체, 그들을 둘러싼 입체적인 생활에 포함된 생활양식이었다. 여러 개의 영혼을 가지면서 자신의 영혼도 다른 영혼의 기억과 생각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많은 영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무당이자 의사가 되었다. 하늘에 제사하는 신당에서 귀신을 부르는 축사(祝詞)나 축문(祝文)으로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사람들은 소원과 치료를 간구했다. 유라시아와 신대륙에서 의례와 의식을 주관하고, 사람의 병을 치료하며, 아픈 마음을 치유했다. 남아메리카의 무속인들은 뗏목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서 불멸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성리학은 ‘하늘이 곧 이(理)’라는 송나라 정호(程顥)에 의하여 창건되었다(1000년). 주희(朱熹)는 ‘사서집주’를 완성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성리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등장하면서 문묘를 국가 제도로 정착시켰다. 그 기반인 도통론은 자연과 인간의 원리이자 질서인 도가 성인에 의해 현실 사회에서 구현된다고 본다. 이러한 성인을 모시는 문묘(文廟)는 성균관과 향교 내 사당으로 신라 성덕왕(聖德王)이 국학(國學)에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제도는 조선 중기에 예송논쟁을 촉발시키면서 사회 혼란과 국력 약화의 원인이 되었다. 성리학에 의한 집단지성, 분열의 시작 문묘의 구조는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東廡)·서무(西廡)를 배치한다. 대성전은 공자, 안자·증자·자사자·맹자의 4성(四聖)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인, 송(宋)나라의 주자학자 6인을 좌우에 배향했다. 동무와 서무에 중국 명현(名賢) 47인과 우리나라의 명현 9인을 배향했다. 석전대제는 문묘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중기에 서인이 인조반정 이후에 호서지방과 경기지방을 기반으로 중앙을 장악하자 다른 지역은 정치권력에서 밀려났다. 상호 세력경쟁이 심해지는 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중앙은행(central bank)은 화폐의 발행, 기준이자율의 결정, 금융회사의 지불준비금 등으로 통화의 공급과 조절을 담당한다. 이자율이 하락하면 소비를 활성화시켜서 경기를 상승시킬 수 있지만 물가 상승으로 국민경제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이자율(기준이자율)을 조정하여 통화량을 감소시킨다. 국제적으로 자본의 이동은 이자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경제적 위험이 큰 국가나 시장의 경우 이자율을 높여서 자본 유출을 방지한다. 따라서 미국의 이자율이 상승하면 국내 이자율도 상승하면서 이자율 하한선이 존재할 수 있다. 국내 물가는 자국의 이자율에 영향을 받지만 글로벌 네트워크 사회에서 환율에 따른 가격변동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국내외 이자율의 격차로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가격의 상승으로 물가가 오르고 하락하면 물가도 내린다. 어느 국가나 경제회복과 고용창출이 우선 과제로 이자율과 환율에 대한 관리를 균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이자율과 환율의 결정 이자율(interest rate)은 불확실한 미래의 소비를 위해 확실한 현재의 소비를 포기한 대가로 사회 전체의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루는 점에서 결정된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