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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㉛]한비 밀수사건(Ⅱ)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3, 4비가 완공되더라도 질소비료의 절대부족이라는 갈증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탁반 강요반으로 또다시 비료공장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1987년 이병철의 사망 직전에 나온 그의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한국비료 공장건설과 관련하여 회고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병철에게 농민들에게 값싼 비료를 공급하기 위한 공장을 꼭 지어달라고 간청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발단은 1964년 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예방한 이병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장은 이제 일을 피하지 말고 새 사업을 일으켜 경제재건에 적극 참여해주시오.”

이렇게 운을 뗀 박 대통령은 농약공장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병철은 “기술, 자금, 시장성을 아직 검토해보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회피했다.

 

“그렇다면 이 사장께서 오랫동안 구상하신 비료공장은 어떻습니까.”

이병철은 그 제의에도 즉답을 피했다. 박 대통령은 “이 사장은 우리 정부에 협조할 생각이 없군요”라고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역부족일 뿐입니다.”

“이 사장이 역부족이라면 다른 사람은 더 논할 것도 없지요.

그러지 말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테니 비료공장을 지어주시오.”

 

“대통령이 혼자 애써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행정부는 물론 거족적인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행정부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이와 같은 큰 사업이 성사되기 어렵습니다.”

박 대통령은 즉석에서 장기영(張基榮) 부총리를 불러들였다.

 

“장 부총리, 이 사장이 비료공장을 짓기로 했습니다. 장 부총리가 전 책임을 지고 뒷받침하시오.”

“최선을 다해서 지원하겠습니다.”

 

이병철은 확답하지 않고 물러 나왔는데 장 부총리는 그 뒤 여러 번 공장을 건설해달라고 간청해왔다고 한다. 장 부총리는 “대통령의 뜻도 그러하지만 나도 내 임기 중에 비료문제만은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장 부총리와 이병철은 부산피난 시절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때 장기영은 한국은행 부총재로 근무하고 있었고 이병철은 제일제당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활기가 넘쳤다. 어찌나 분주한지 세상을 마치 혼자서 다 사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병철은 장 부총리에게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연산(年産) 30만t 규모의 비료공장을 짓는 데는 첫째 정부시책이 조령모개(朝令暮改)가 안 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하고 대외교섭 등 모든 권한을 삼성에 일임한다는 정부의 공한이 필요합니다.”

 

장 부총리는 한 마디로 이를 수락했다. 며칠 후 박 대통령은 이병철을 불렀다.

“결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차피 이 공장은 이 사장이 짓는 것이니 서둘러주십시오.”

 

박 대통령은 그렇게 말한 뒤 동석한 장기영에게, “이 사장이 일단 약속한 이상 안심해도 됩니다. 그 대신 정부가 지원할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시오”라고 거듭 당부했다.

 

일단 일을 시작한 이병철은 미친 듯이 몰입했다. 그는 세계 최대를 원했다. 당시 소련이 30만t 규모 공장을 짓고 있었으므로 이를 능가하는 33만t으로 잡았다. 건설계획 검토 중 이병철은 보일러와 파이프를 그대로 두고 암모니아와 요소의 주요 부문만 조금 늘이면 생산능력을 3만t 늘일 수 있다는데 착안, 결국 연간 36만t 규모로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유솜 측이 또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이미 3, 4비를 건설 중인데 또다시 대규모 비료공장을 민간기업체가 지을 경우 그들이 입을 타격을 방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장기영이 팔을 걷어붙이고 담판을 위해 거들었고 박정희도 미국 측의 협조를 요청하자 유솜도 한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한일회담이 타결되고, 일본자본은 한국진출의 호기를 만났다. 미국의 반대도 일본을 견제하려는 속뜻이 있었던 것이다.

 

1964년 8월 20일 이병철은 일본 미쓰이(三丼)물산과 4190만 달러의 차관계약을 맺었다. 여기에 다시 200만 달러가 추가되어 총 4390만 달러의 차관도입을 경제기획원은 즉각 승인했다.

울산공단 내에 35만평의 부지를 사들여 1965년 12월 10일 정지공사를 시작으로 한국비료의 대역사는 시작됐다.

 

삼성은 그룹의 엘리트들을 가려 뽑아 한비에 투입하고 충주비료의 기술진을 대거 스카웃했다.

설계와 감리는 미쓰이 계열사인 도오오 엔지니어링이, 공사의 기계부문은 현대건설, 건축부문을 대림산업이 맡았다. 일본자본과 기술이 주도한 5비건설이었다.

 

‘돌관작업이었다. 군대보다 더 군대다운 특공대 작전이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쉴 틈 없었고, 가족이 면회 오면 나가 여관에서 잠시 만나고 돌아오는 정도였다.

 

삼성 측은 왜 이처럼 돌관작업을 강행했느냐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본의 회임 기간을 단축하려는 기본적인 계산 외에도 3, 4비와의 경쟁도 작용했을 것이고, 이회장의 집념도 보태졌을 것이다.’ 권순영 전 한국비료 사장의 회고다.

 

삼성의 한비공장건설, 감춰진 이면

 

그러나 공장이 채 완공되기도 전인 9월, 불의의 대사건이 터졌으니 그게 바로 한비밀수사건.

9월 15일자 각 신문은 ‘재벌밀수’라는 타이틀로 일제히 1면에 보도했다.

 

“부산세관은 지난 6월 한비가 사카린 원료인 OTSA 약 2000부대를 백시멘트로 위장하여 건설자재로 밀수입한 것을 적발하고 그 물품을 압수하는 한편, 이미 벌과금 2000만원을 부과 징수했다고 한다. 밀수입한 사카린 원료 2000부대 중 500부대는 이미 시중에 유출됐기 때문에 1500부대만 압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무부 명동근 관세국장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2300만원의 벌과금과 추징금을 부과한, 이미 종결된 사안이라고 밝혔다.”

 

문제의 발생은 1966년 5월 5일 한비공사가 급피치를 올리던 무렵이었다.

비좁은 울산항에 건설자재가 밀어닥쳐 항만의 적체현상이 발생하자 한비 구내에 보세구역이 허가됐고, 이 구역에 각종 자재를 야적했다가 바로 공사에 투입했다.

 

이곳에 이탈리아 몬테카니니사의 OTSA 60t이 창고에 쌓였다. OTSA는 비료생산공정에서 유황분을 제거하는 촉매제이자 인공감미료인 사카린의 원료다. OTSA가 비료생산뿐만 아니라 사카린 원료도 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15일 회사간부들이 이중 일부를 빼돌려 부산의 인공감미료 공장에 팔아 넘겼다가 부산세관에 적발된 것이다. 당시 한비는 수입원가의 4배에 달하는 2330만원의 벌금과 추징금을 물었으나,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갔다.

 

당시 밀수는 5대 사회악의 하나로 대통령 특명으로 세관, 검찰, 경찰의 합동단속반이 처리를 맡고, 그 결과는 장관에게까지 보고되고 있었다.

 

당시 재무부장관 김정렴은 신문보도가 터졌을 때까지도 이 사건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며, 세관 측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해당하는 사건을 검찰에 고발도 하지 않고 통고처분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충격과 물의가 컸다. 더욱이 비료공장건설을 빙자해 각종 특혜를 받는 재벌이 이를 이용, 밀수를 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고 다음 해의 선거를 앞둔 정가에서도 일대 회오리가 몰아닥쳤다.

 

한비 측은 이번 사건은 현장책임자인 이일성 상무 개인이 저지른 일이며 이미 벌과금까지 냈다는 해명서를 냈고, 신직수 검찰총장도 부산세관의 벌금 및 추징금이 통고된 이상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에 조사할 수 없다고 밝혔으나 비등한 여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급기야 19일 박 대통령의 전면조사 지시가 떨어졌다. 국회본회의에서도 연일 성토대상이 됐고 김두한의 오물투척사건도 이때 터진 것이다.

검찰 측이 발표한 사건 전모는 이렇다.

 

“한비는 비료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내자조달이 여의지 못하자 이익률이 높은 품목인 사카린 원료 OTSA 2400부대를 대일상업차관자금으로 건설자재인 시멘트로 위장, 5월 4일 부산항으로 들여온 뒤 이창희와 이일섭이 공모, 이를 금북화학에 팔아 관세를 포탈했다.”

 

이택규(李宅珪) 당시 수사검사가 실토한 대로 한국비료공장 지하에는 많은 밀수품들이 파묻혀 있었다. 회사 차원의 조직적인 밀수였다. 이런 사실을 과연 이병철이 모를 수가 있었을까.

 

국회에서 똥벼락을 맞아야 했던 김정렴 재무부장관과 민복기 법무부장관이 책임을 지고 퇴진했으나, 물러난 뒤에도 국회특위에 불려 다니는 곤욕을 치렀다.

 

박 대통령은 한비 밀수사건이 터지자 이 공장의 건설에 차질이 빚어질까 봐 무척 걱정했다. 그는 정보부의 이병두(李秉斗) 차장과 전재구(全在球) 3국장을 불렀다.

 

“세계에서 가장 큰 비료공장을 지어 농민들에게 값싼 비료를 공급하려고 했는데 밀수사건이 터져 차질이 우려된다. 밀수사건 수사는 검찰에 맡기고 건설은 어떤 경우에도 중단 없이 해야 한다. 임자들이 울산으로 내려가서 현장사람들을 안심시켜주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사는 중단하지 않도록 정부가 책임진다고 말하고 와.”

 

그런 당부를 하면서 박 대통령은 두 사람에게 여비까지 보태주었다.

두 사람은 울산의 한국비료공장 건설 현장에 내려가 인부들을 불러모아놓고 흔들림 없이 공사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1968년 한비 밀수사건이 일단락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박 대통령은 김형욱(金炯旭) 부장을 통해 전재구 국장에게 이 사건의 진상을 정보부가 조사해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한비밀수와 관련해서 뜬소문이 끊이질 않아 대통령도 진상을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전재구의 기억에 따르면 정부가 삼성에 한비공장건설을 허가한 서류들을 살펴보니 ‘공장 건설에 필요한 시설 및 자재 일체에 대한 도입허가’라고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포괄적인 허가조건을 악용하여 공장에 필요 없는 물건들까지 들여와 시중에 내다 팔아 내자를 조달하려다가 사고를 냈다는 것이 전재구 팀의 조사결과였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허가를 내준 정부는 사실상 삼성에 밀수면허를 내준 셈이 된다.

 

밀수사건 뒤에 숨은 권력들

 

이병철과 삼성 측은 자신들이 정치적 희생양이라며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설탕을 독점하는 제일제당을 가진 삼성이 경쟁품목인 사카린을 밀수까지 해가며 팔았겠는가.”

 

“OTSA는 미쓰이 측에서 공장시운전에 필요한 촉매제로 보낸 것으로, 수입자체는 합법적이다. 다만 일부 간부들이 몰래 일부를 빼낸 것은 원자재 부정유출이지만, 결코 계획적 밀수는 아니었다.”

 

“세관에 적발된 것은 5월이고 사건이 터진 것은 넉 달이 지난 후였다. 일사부재리원칙 위반이다.”

 

이병철은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본다. 복합적으로 얽힌 이 사건의 내막에 관련된 사람들이 아직 많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한국비료 주식 30%를 내놓으라는 압력을 가해왔던 것이다. 그래야만 사건을 만들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결국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이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에는 정치인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나와 가깝게 지내면서도 자기들끼리 서로 싸움을 하는 바람에 사이가 나빠진 그들은 서로의 사이가 악화되자, 나를 정치적 재물로 삼아 버렸다.”

 

그는 더 이상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지만 이 사건에 정치권력과의 흑막이 숨어 있고, 선거를 앞둔 여권 내부의 암투와 여론을 이용한 인기작전에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야당은 정치자금 의혹을 들고 나왔다.

비료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은 4390만 달러. 같은 규모의 공장을 짓는데 일본에선 2200만 달러면 충분하고, 소련의 한비규모의 공장을 2800만 달러에 판매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1000만 달러를 일본에 도피시켜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간 것 아니냐는 것이 김대중의 질문요지였다.

 

그렇다면 그 진상은 대체 뭘까. 다행히도 꼭 진실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점에서 의미 있는 내용이 김형욱 회고록에 남아 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의 지시로 한비사건에 개입, 공장의 완공을 서두르는 한편, 중정분실까지 현지에 설치하고 정보수집에 나섰다.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은 관계자들에게 200만 달러의 커미션을 상납하고 이를 벌충하는 한편, 내자조달을 하려는 속셈으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을 골라 건설자재로 위장, 밀수했다. 사카린은 물론이고 표백제, 전화기, 수세식변기, 목욕하는 욕조까지 1만 가지에 달하고 있었다.

 

경제개발과 차관재벌의 명암

 

김두한 의원의 분뇨투척사건이 있은 며칠 뒤, 이만섭(李萬燮) 의원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청와대로 들어갔다.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엄민영 내무장관,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정보부장도 와 있었다. 식사 도중 반주가 몇 순 배씩 돌자 김형욱 정보부장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하, 이번에 김두한이 오물을 뿌린 것은 김종필이 시켜서 한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김 부장이 잘못 알았겠지.”

“틀림없습니다. 사카린 밀수사건을 처음 보도한 것이 경향신문인데 그것은 JP계열인 김용태(金龍泰) 의원이 정보를 흘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두한이 구속되어 형무소에 갈 때도 JP라인인 김택수(金澤壽)가 5만원짜리 수표를 건네주었습니다. 연설 내용을 보아도 이후락 실장과 장기영 부총리는 공격하면서도 김종필은 동정하는 투였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김 부장의 이야기를 거들면서 사건 배후 인물로 김종필을 지목했다. 박 대통령도 김형욱 부장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김 부장, 그러면 김두한이를 끝까지 다그쳐서 자백을 받아내.”

앉아 있던 이만섭 의원은 ‘이것 큰일났구나. 대통령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으면 결국 대통령도 오판하게 마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 후 한 사람씩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헤어질 때 이만섭 의원은 일부러 맨 마지막까지 남아 박 대통령과 서재에서 독대했다.

 

“각하, 저는 JP라인도 아니고 공화당에 입당한 것도 대통령 한 분을 믿고 들어왔습니다. 오늘 나온 이야기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경향신문에 기사가 난 것은 JP계열에서 흘려준 것이 아니고 울산 지국을 통해 취재해서 보도한 기사입니다.

 

김택수 의원이 김두한 의원에게 돈을 준 것도 같은 건설위원회에 속해 있던 김 의원에게 사식이라도 사 먹으라고 인간적으로 준 돈입니다. 그리고 김두한 의원이 남에게 사주를 받아 연설할 사람도 결코 아닙니다.” 박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얼마 뒤 이만섭 의원이 식당에서 우연히 김두한을 만났더니 혹독한 수사를 받은 것 때문에 건장하던 사람이 몰골은 초췌해지고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이 무렵 김종필 공화당 의장은 미국 웨스터 민스터 대학을 방문,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는 도중에 월남을 방문하고 있었다. 1986년 월간조선 11월호에서 김종필은 이렇게 증언했다.

 

“월남에서 국내 소식을 들어보니 그 야단이 났더구먼. 내가 돌아온 뒤 나중에 김두한 의원이 나한테 얘기를 해요. 그런 음모가 있더라구. 그런 식으로 진술하라고 강요까지 하고 그랬는데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느냐고 그래요. 그래 내가 세상에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짓을 했겠어요. 그때 조사했던 검사도 세상 떴지만, 속으로 나한테 퍽 미안해하면서 갔을 거요.”

 

한비 사카린 밀수사건은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李昌熙)가 구속되고, 피할 길이 없다고 판단한 이병철은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참된 운영과 보다 알찬 농촌경제의 부흥을 위해서는 한국비료건설에 국가가 직접참여하고 경영을 맡는 것이 한비의 창립정신을 더욱 살릴 것”이라며 공장의 국가헌납과 경영일선 퇴진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그는 건설 중인 공장을 마저 다 지어서 바쳐야 했다.

1967년 10월 한비주식의 51%가 헌납됐고 이 주식은 산업은행에서 인수했다.

이병철로서는 박정희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비를 끝으로 장기영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직에서 해임된 것도 우연한 일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파동에서 누구 못지않게 피해를 입은 장본인은 박정희 자신이었다. 10월 15일 대구에서 박정희의 숙명적 라이벌인 장준하는 ‘재벌밀수를 막지 못한 죄는 바로 대통령에게 있다’고 몰아세우면서 박정희를 ‘밀수왕초’라고 규정지었다. 그것 때문에 장준하는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기도 하였으나, 박정희가 받은 정신적 피해는 징역 6개월 정도가 아니었다.

 

어쨌든 한비사건은 당시 경제개발과 차관재벌의 명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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