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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기획] 아듀 세무대! 세무대학 졸업생 5099명의 7587일

 

(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2018년 3월 16일, 옛 국립세무대학 터가 팔렸다. 2001년 폐교 후 신입 세무공무원 교육이란 기능을 담보 삼아 터만은 지켜왔다. 하지만 교육원의 제주 이전으로 그 마지막 기능마저 잃게 됐다.

 

함성이 가득 찼던 흙 무지운동장도, 울긋불긋한 낙엽 길도, 곧 반들반들한 콘크리트 길과 아파트 숲으로 바뀌게 된다. 그곳이 있었다는 증거는 기념품 몇 점과 겨우 살아남은 건물 두어 동 정도다. 그마저도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그러나 세무대학은 단순한 공간도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기억으로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 시기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또 다른 시대상이었다. 급성장하는 국가 규모를 운영하기 위해 전문성이 필요했고, 자원없는 한국에서 기댈 것은 사람뿐이었다. 시대가 사람과 장소를 불러모은 것이다.

 

1981년 3월, 버스기사조차 막연한 황톳길.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전국에서 모여든 360여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웅성거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일합섬 수원공장 옆 여자실업고등학교. 세무대학의 시작은 남의 집 더부살이였다.

 

“처음에는 학교 건물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학교를 짓고는 있었는데, 개교에 맞춰 완공되지 않았죠. 합일합섬 여자실업고등학교(현 수원여자전산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1년 세무대학 1기 입학 당시 한일합섬 여자실업고는 개교한 지 1년 남짓했다. 덕분에 교실과 기숙사 일부가 비어 있었다. 야간실업고라서 교실 부족할 일은 없었다. 세무대학 초기에는 남학생만 받다 보니 비좁은 화장실을 줄지어 써야 했다는 점은 불편했다.

 

세무대학은 입고, 먹고, 자는 것까지 전액 국비지원을 받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하지만, 학교 미완공 때 들어간 1기생들만은 1학년 1학기 동안 국비를 받아 자유로운 하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1학년 대학생의 ‘자유’는 아니었다.

 

“회계부기·세법…전부 처음 보는 과목들이었다. 1기 입학생 나이도 1954년생에서 1963년생까지였고, 처음부터 경쟁하는 분위기였다.” 참고로 세무대학 학훈은 사명감, 극기, 성실, 협동이었다.

 

자존심 속 가족애

1980년대 대학교육은 지방거점국립대와 서울에 집중된 국공립·사립대학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대학을 간다는 것은 고향을 떠나 서울 유학 혹은 도시 유학을 뜻하고, 집안의 막대한 지원이 필요했다.

 

우골탑(牛骨塔), 인골탑(人骨塔)…. 대학생이 그나마 손쉽게 돈벌 수 있었던 방법은 ‘과외’였다. 하지만 5공화국의 과외금지정책으로 그마저 금지되면서 부모와 학생들의 부담은 커졌다. 1990년대 임박하면서 과외금지는 풀렸지만, 점차 높아지는 등록금으로 부담은 커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무대학이 생길 당시 세무공무원의 이직률은 17%에 달했다. 그러다 보니 국비교육으로 수재를 끌어들이되 의무복무 기한을 두자. 그렇게 세무대의 역사가 시작됐다.

 

인기와 실력도 대단했다. 전국 상위권 학생들조차도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는 세무대 마지막 기수인 19기까지 매한가지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세무대학은 대학입시 입결표라든가에 나오지 않아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로부터 알음알음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세무공무원이 되는지도 모르고, 그저 국비로 회계, 세무 등 전문적인 과목을 교육하는 곳이라고만 알았습니다. 입학하고 나서야 졸업후 세무공무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죠.”

 

부모님을 돕겠다는 마음만이 ‘열공’의 이유는 아니었다. 세무대학이 일반 사립대, 국립대만큼 알려지지 않은 것은 돈은 없지만, 전교에서 1, 2등 좀 한다는 학생들이 지원했고, 고등학교 교사들도 그러한 제자들에게만 세무대학을 권했다.

 

학교에서도 학구열을 가속했다. 학교 축제 첫날 쪽지시험으로 교실과 도서실에서 하루를 보냈다는 증언이 부지기수다. 한 졸업생은 “교수님들, 정말 안 봐줍니다”며 뒤늦게 토로했다. 수재들만 모이다 보니 재학생 사이에도 자존심 경쟁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 10기생의 진술이다.

 

 

“졸업하려면 회계부기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시험 보는 곳이 국세청과 대한상의였습니다. 국세청 따기가 더 어려웠는데, 1학년 전체 250명 중 15명, 2학년 돼서야 반 정도가 국세청 부기를 딸까 말까였습니다. 고교 시절 전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다 보니 국세청 부기를 못 따면 매우 괴로워했죠. 딸 때까지 계속 밤새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기자 : 따셨나요?), 1학년 때 땄습니다(웃음).” 다른 기수 졸업생의 증언도 비슷하다.

“아침 6시 일어나서 구보하고, 씻고, 식사하고 잠시 예습하고, 저녁 6시까지 수업이 이어졌습니다. 저녁 후에는 동아리 들어가거나 도서관 가서 공부합니다. 동아리도 학습동아리가 있었고, 저녁 10시가 취침시간이었는데,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은 도서실에서 새벽까지 공부했죠.”

 

 

세무대학생들은 2년이란 단기간에 민법·세법·회계원리·헌법·통계학·행정학·경제학 등 어려운 학과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교수들도 주축은 현장 세무공무원들이다 보니 사례중심으로 강의했다. 이론의 기틀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수업이었다. 이들에게 청춘의 낭만…은 아무래도 쉬이 떠오르지 않는 단어였던 모양이다.

 

“어느 선배가 그러더군요. 대학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직업훈련소라고 생각하면 편하다고요. 2학년 돼서 후배들 챙기다보니 ‘우리도 평범한 대학이구나’ 그렇게 되더라고요.”

 

파장동 막걸리 가게와 미팅

그리고 ‘아침엔 우유 한 잔’

 

아무리 본분이 있다지만, 그들도 피 끓는 청춘이었다.

파장동 막걸리 가게는 낭만을 토로하는 배출구였다. 세무대학은 수원에서도 워낙 외곽지역에 있었고, 흔한 배달음식 시켜 먹을 곳 하나 없었다.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았고, 할 공부도 많아 자주는 못 갔지만, 선후배들과 기울이는 막걸리 한 잔으로 묵었던 피로를 가시곤 했다.

 

학교동아리도 학습동아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학생들은 학습동아리와 예체능 관련된 동아리를 각각 하나씩은 가입했다.

 

학교는 교과과정에 체육수업이 있어서 그런지 운동장만은 확실하게 보장했다. 개교 처음에는 축구가 대세였지만, 90년대 미국 NBA붐이 일면서 농구인구도 늘었다. 체육관과 널찍한 테니스장도 생겼다.

 

수원 파장동이 점차 개발하면서 취미종목은 당구, 탁구, 볼링으로까지 점점 넓어졌다. 임용구분을 막론하고, 놀 때는 노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보니 국세청, 관세청 세무공무원들은 중앙부처 체육대회에서 곧잘 상을 타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성과의 미팅도 빠질 수 없는 감초였다.

미팅은 근처 D전문대학생들하고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기숙사 생활, 외박과 외출조차 제한적으로 허용되다 보니 자연적으로 1기부터 19기까지 로맨스는 D전문대학생들과 발생했다. 개중에는 결혼까지 골인한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재학생 중에도 D대학을 마냥 반기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성 동문에게 ‘너희들 쪽팔린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재학생들이 대부분 명문고 수재들이다 보니 상위권 대학생들하고만 만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여성학우는 동아리와 MT의 별이었다.

“아무래도 눈이 가죠. 나중에는 신입생의 40%까지 여성을 뽑았지만, 8기 때 처음 여성을 뽑았을 때는 전체 재학생의 5%로도 안 됐습니다. 선배들이 무척 잘해줬죠.”

 

유행가는 시기별로 달랐다. 선배들일수록 가요제 히트곡을 자주 들었고, 90년대에는 록 음악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아침엔 우유 한잔, 점심엔 패스트 푸드…’ 그룹 N.E.X.T 1집 <HOME>의 ‘도시인’이, 오후에는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흥얼거렸다. 마지막 기수였던 19기에서는 핑클 등 보이그룹, 걸그룹의 유행가가 대세였다.

 

기숙사 생활은 개인별로 달랐다.

“누군가는 자유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나 둘 발전하는 데는 규칙적인 생활만한 게 없죠.” “기숙사 자치회가 매우 엄격했습니다. 선배도, 후배도 안 봐줬죠. 거꾸로 규정만 지키면 편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기숙사 생활을 했고, 군대도 가봤지만, 세무대학이 제일 편했죠.”

 

“다들 공부하고 아침저녁 점호하고, 공동생활의 틀이 딱 되니까 빗나갈 틈도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불만 없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기숙사에 고향선배도 있고, 스스로 문제 생길 일을 삼가는 거죠.

 

교수님들도 ‘너희는 학생이지만, 준공무원이다’라며, 계속 이야기했죠. 전문성도 이유지만, 세무공무원 부정부패 사건이 큰 게 터지면서 세무대학이 생겼기 때문에 교수님들께서 ‘너희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며 기강과 사명감을 강조했죠.”

 

 

인생에서 세무대란?

공무원 중에서 사회적 대우가 높은 세무공무원이었지만, 콤플렉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무대학이 2년제 아닙니까. 자부심은 있었지만, 정규 4년제 대학이 아니라서 졸업해도 스트레스 좀 받았지요. 후배들도 ‘선배님은 왜 석박사 안 땁니까’ 하덥니다. 물론 그냥 공무원 생활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우리가 못할 게 뭐 있느냐, 기회 되면 4년제 석박사 따고, 전문자격증도 따고 했습니다.”

 

세무대 1기들은 1학년 2학기부터는 세무대학 강의동, 기숙사동 등 주요 건물이 완공돼 본격적인 기숙사·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비가 오면 발이 푹푹 꺼지는 진탕길을 걸어야 했다.

 

이게 얼마나 한이 됐던지, 이제 막 세무공무원이 된 세무대 1기생들은 한 명당 석달 월급치에 해당하는 돈을 걷어 학교배수로를 싹 깔아주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 한 곳에서 먹고 자고 같은 일을 하며, 같은 주제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나 선후배는 많지 않다.

 

‘나에게 세무대학은 무엇인가?’

운명, 나의 삶… 등 애써 단어를 더듬어가며 깊고 넓은 애정을 담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돈 없었던 젊은 시절의 한, 일만한 내 청춘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은 미래로 이어지고, 그것은 기억과 흔적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진다. 학교가 없어지고, 터가 없어지고, 사람마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서 흘린 땀과 눈물은 대한민국 국세행정 역사에 분명히 존재하고, 후대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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