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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⑮] 이상한 한국은행 독립 1950~1998년

파리 목숨 은행장 ②

은행장들의 수난
1970년대 대형 금융사고가 빈발할 무렵 은행장의 목숨은 한마디로 ‘파리 목숨’이었으며 재수가 없는 경우에는 쇠고랑을 차고 교도소에 드나들기 일쑤였다. 하기는 그전에도 은행장 구속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 자금조달사건으로 송인상(宋仁相) 재무장관, 김진형(金鎭炯) 한은총재, 김영찬 (金永燦) 산은총재, 이기붕의 6촌 동생인 이기호(李起虎) 제일은행장 등이 검찰에 구속되어 혁명재판에 회부된 적은 있다.


또 1961년 산업은행 이필석(李珌奭) 총재는 40일 간의 수형 생활(囚刑生活)을 맛본 적이 있었다. 총재 취임 8일째 되는 날 6월 8일 새벽, 중앙정보부 기관원에 연행돼 마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체포이유는 상업은행 은행장 당시의 대한제분 대출사건 내사착수였다.

 

그러나 수감의 진짜 배경은 장도영(張都瑛) 의장을 중심으로 한 반혁명사건에서 의혹이 짙어가던 모 장군과의 연관관계로 취조를 받았다. 결국 정치싸움의 유탄에 희생되었고 행장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금융사고와 관련돼 현직 은행장들이 수난을 당한 경우는 1972년 외환은행 홍용희(洪龍熹) 행장 구속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금융사고만 터지게 되면 은행장은 단골로 수사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1972년 3월, 수사가 시작됐던 외환은행 LA지점의 630만 달러 부정대출사건. 당시 검찰 수사결과 홍용희 행장이 유령회사를 차린 재미 실업가에게 대출을 해주면서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홍 행장 등 간부들이 대출을 해주고 29명으로부터 모두 39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홍 행장이 사임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974년 4월,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금록통상(金鹿通商) 박영복(朴永復) 사건 때로 중소기업은행 정우창(鄭遇昌) 행장이 구속되었다. 정 행장은 1700만원을 받았다고 기소되었으나 대법원에서 300만원만 인정하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추징금 400만원을 선고받았다.


또 서울은행 심병식 행장도 박영복과 관련돼 임기 6개월여 남긴 채 책임을 지고 4월 사임하였다.


허위 주식담보대출 사건
정 행장 구속사건 이후 은행장은 사정의 표적이 되어 금융사건만 발생하면 금품수수로 옷을 벗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뿐만 아니라 눈 밖에 난 은행장을 퇴출시키려면 금품수수혐의 카드를 썼다. 최근에는 계좌추적을 빌미로 은행장을 몰아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1976년 8월, 경기은행 류제국(柳濟國) 행장과 전북은행 최주열(崔株漢) 행장이 주총 전에 물러났고 경남은행 최희 열(崔熙烈) 행장은 쇼크로 지병이 재발하여 사망하였으 며, 윤승두(尹承斗) 전 한일은행장이 서울신탁은행장에서 물러난 사고가 발생했다.


소위 ‘허위 주식담보대출 사건’, 이젠백 맥주제조회사인 한독맥주주식회사(경남 마산시)와 모회사인 삼기물산(三 起物産)은 회사주식을 대량 위조, 엉터리 수출계약서를 만들어 1975년 7월부터 1976년 5월까지 시중 8개 은행으로부터 22억5000만원을 부정대출 받았다.


1975년 7월, 이 회사 사장인 이준석(李俊錫, 54)은 그 동안 맥주 판매부진으로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불법으로 은행융자를 받기 위해 회사간부들과 짜고 한독맥주 주식 392만주(1주당 액면가액 500원)를 대량 위조했다. 이 주식을 재무부의 주식발행승인도 없이 전북은행 서울지점등 7개 시중은행으로부터 담보 대출 받아 회사운영자금으로 썼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과다 융자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지방은행장들이 무더기로 물러났다. 지방은행장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위조주식을 담보로 취득한 것은 한일은행뿐인데, 그 은행장 윤승두는 서울신탁으로 자리를 옮긴 뒤라 사임은 염두에 두지도 않아 세간에 빈축을 샀다. 이 사건을 맡은 검사 중에 하나가 퇴진한 지방은행장의 사위였다고.

 

율산그룹 부정대출 사건
1979년 4월 14일, ‘무서운 아이’로 불리던 신선호(申善浩) 의 ‘율산그룹 부정대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상업은행장을 제외한 4개 시중은행장이 한꺼번에 물러났다.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 홍윤섭(洪允燮) 행장은 구속 수감되고, 부거래은행인 한일은행 김정호(金正浩) 행장, 조흥은행 이동수(李 洙) 행장, 제일은행 홍승환(洪 承丸) 행장 등 3명의 사표를 전격 수리하였다. 홍윤섭 행장의 구속은 억지였다. 홍 행장은 “왜 나 혼자만 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항변,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기에는 억울 하다는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다른 3개 시중은행장의 사임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구속사유를 보자.


“은행장 홍윤섭은 1978년 9월 율산그룹이 극도의 자금 압박을 받아 도산위기에 처했을 때 한일은행 김정호 행장, 조흥은행 이동수 행장, 제일은행 홍승환 행장 등을 모아 구제금융회의를 열고 무담보로 특혜금융 1차 30억원, 2차 40억원, 도합 70억원을 지원해 주었다. 그 회의과정에서홍 행장은 율산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과 계약한 3억 달러 공사가 취소된 줄 알면서도 앞의 세 은행장에게 마치 사실인 양 이야기 했고, 율산이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양호하다고 기망을 했다.”


아마도 율산사건이 이렇게 비화될 줄 검찰총장이나 재무장관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사내용을 브리핑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대노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참석했던 고위관계자들이 문책강도를 높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 장 어음 사기사건
5공 초기인 1982년 4월에 터진 ‘이·장 어음 사기사건’으로는 임재수(林在琇, 52) 조흥은행장과 공덕종(孔德鍾) 상업은행장이 구속됐다. 임 행장은 전남 광산 출신으로 은행원 중에서는 보기 드문 경제이론가이기도 했으며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금융계 사상 처음으로 한은 이사에서 시중은행장으로 영전된 행운아였다. 그러나 이·장 어음 사기사건 수사과정에서 잘못이 드러나 구속되면서 많은 금융인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임재수 행장은 1981년 10월 12일부터 1982년 4월 27일 사이에 당좌대출과 어음보증의 형식으로 일신제강에 389 억원, 공영토건에 344억원을 각각 부정대출해줬다. 1981 년 11월 말경 장영자(張玲子)로부터 일신제강 또는 공영토 건에 대한 대출금회수가 불가능 또는 위험함에도 대출금을 원활하게 달라는 부정한 청탁을 받고 그 대가로 1억 5000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것이다. 1983년 3월 8일 3심 선고에서 업무상 배임 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조흥 은행 전 은행장 임재수에게는 징역 4년 추징금 1억5000만 원이 선고됐다.


임 행장과 함께 구속됐던 공 행장은 천주교 실업인단을 이끌고 로마 교황청을 방문, 교황 바오로 2세의 방한을 교섭하기도 했을 정도다. 공 행장은 처음 법정에서 범죄사실을 부인하다가 “신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감출 수 없어 뇌물을 받았음을 인정한다”고 답변, 언론의 주목을 끌었었 다. 공덕종 행장의 잘못된 내용은 이렇다.


“1982년 2월 9일부터 22일 사이에 부실기업인 일신제강의 207억원 회사채발행을 지급 보증하여줌으로써 이 금액상당의 손해를 앞의 은행에 가하였다. 또한 1979년 12월 중순경부터 1982년 1월 4일경까지 사이에 일신제강 대표 이사로부터 금융편의 청탁명목으로 5000만원을 수수하였다.”


영동개발진흥사건(永東開發振興事件) 관련 조흥은행 이헌승(李憲升) 행장은 1993년 9월 15일 동행 중앙지점에 대한 자체감사를 실시, 그 결과를 발표하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의외로 큰데다가 관련 직원이 많아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 행장은 한은출신으로 조흥은행장이었던 임재수가 구속되고 사임하자 뒤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1년 4개월 만에 또다시 금융사고에 휘말 리는 비운을 맞은 것이다. 1993년 10월 8일 사표를 내고 귀가한 이 행장을 연행했다.

 

이에 앞서 검찰은 영동개발진흥에 대한 담보 초과 대출이 많은 점을 이상히 여겨 이복 례(李福禮) 회장을 집중 추구한 끝에 금품수수사실을 밝혀냈다. 이 행장은 검찰에서 수회 사실을 추궁받자, “2시 간의 여유를 달라”고 부탁한 뒤 한참 눈을 감고 ‘명상’ 한후 약속한 시간이 지내자 물 한 컵을 시켜 마신 후 관련 사실을 순순히 털어 놓았다.

이 행장은 사건이 표면화된 1993년 9월 14일 영동개발진흥 이 회장으로부터 구제금융부탁과 함께 7000만원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조흥은행의 임 행장과 이 행장이 연달아 불미스런 금융사고로 구속된 뒤 후임에 오른 송기 태(宋基台) 행장은 주주들로부터 “은행장실에서는 외부인 사와 커피도 마시지 말라”는 따가운 소리를 들었다는 얘기가 널리 알려졌다.


靑, 부동산 투기로 악화된 여론을 은행장 해임으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집권 때인 1990년 5월.
한일은행 이병선(李柄宣) 행장의 전격 해임은 금융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엄연한 시중은행장인데다 정기 주주 총회에서 행장으로 선임된지 고작 78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일은행장의 해임사유는 대기업의 부동산 매입을 승인해 주는 과정에서 여신관리규정에 의한 심사를 소홀히 했다는 책임을 물어 취해진 것이다. 그러나 규정의 책임 소재를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 은행장으로서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재벌의 부동산 투기가 뜨거운 사회 이슈로 떠오르자 청와대 측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정영의(鄭永儀) 재무장관이 불려갔다. 고위층으로부터 당시 사회분위기와 관련해 호된 꾸지람을 듣고 나온 정 장관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금융계에 강도 높은 문책조치를 취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청와대 측 주문은 은행장 여러 명을 해임하는 초강경 카드였다. 간곡한 설명 끝에 한명 선으로 줄이는데 성공한 정 장관은 남태령을 넘어 청사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승용차를 은행감독원으로 몰았다.


정 장관은 이 행장을 불렀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사표를 내라고 한 것은 아닌 것. 다만 고위층의 의중을 충분히 전달하면서 스스로 판단토록 은근히 압력을 넣은 것. 결국 이병선 행장은 사표를 제출케 됐고, 조흥, 상업, 제일, 서울신탁은행장은 모두 경고조치를 받았다.


문민정부, 6공 정권과 긴밀한 은행장들 불명예 퇴진시켜
김영삼(金永三) 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 1997년 사이에 사법 처리된 6명을 포함, 18명의 은행장들이 불명예 퇴진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1995년을 기점으로 판이하게 다르다. 문민정부 초기인 1993년과 1994년에는 주로 6공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은행장들이 옷을 벗었다. 서울신탁은행 김준협(金俊協)과 보람은행 이병선(李柄宣), 외환은행 김재기(金在基), 동화은행 안영모(安永模) 행장이 이에 해당된다.


1995년 이후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부도업 체와 관련된 대출비리에 관련돼 퇴임시킨 경우와 다른 하나는 금융실명제 위반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장기신용은행 봉종현(奉鍾顯), 제일은행 이철수(李喆 洙), 서울은행 손홍균(孫洪鈞), 제일은행 신광식(申光湜)과 조흥은행 우찬목(禹贊穆) 행장은 전자에 해당되고, 그리고 동화은행 선우 윤(鮮于 潤)행장과 서울신탁은행 김영석(金永錫) 행장은 후자에 해당된다.


1993년 문민정부 벽두부터 사정태풍이 불었다. 동화은행 안영모 행장은 동은행 경비 영수증을 변칙처리하여 23 억5000만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 고, 같은 해 5월 은행장을 사퇴했다. 비자금은 6공 정치자 금으로 제공됐다는 후문이다.


1995년 4월 장기신용은행 봉종현(奉鍾顯) 행장이 구속 수감됐다. 봉 행장은 이 은행 전무로 재임하던 1991년 9월 부터 덕산(德山)그룹과 덕산시멘트 광양공장 증설자금 명목으로 240억원을 대출해주고 그 그룹 박성섭(朴誠燮) 회장에게서 대출사례금으로 3차례 45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1996년 5월에는 제일은행 이철수(李喆洙) 행장이 효산(曉山)그룹으로부터 2억5000만원의 대출 커미션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끌려갔다. 이 행장과 효산그룹 장장손 회장간의 커넥션은 이 은행 박기진 전 행장 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효산그룹이 제일은행과 거래를 튼 것은 1992년 3월
제일은행과 효산이 관계를 맺게 된 실마리는 박기진(朴 基鎭) 전행장의 동생 경진이 경영하던 학산개발에서 찾을수 있다. 제일은행에서 570억원을 빌려준 학산이 부도가 나자 학산계열사 하나를 효산이 인수한데 이어 제일은행이 골칫거리 부실기업들 몇 개를 처리해 주면서 자금거래를 본격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효산은 1994년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 행장은 거래과정에서 불가능한 대출을 가능하게 해준데 따른 반대급부 즉 대출 커미션이 있었기 때문에 구속 되었다. 여기에 전 청와대 부속실장 장학로(張學魯)가 축재비리를 했는데 그 중에 효산으로부터 6000만원의 대출 알선 청탁금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국경제秘話 16편]이 10월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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